얼마 전에 남자친구의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와서,

대뜸, 여자친구가 수은님이냐는 질문을 던졌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겉과 속이 다르고,

낮과 밤이 다르며,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철저하게 선을 긋는

레알 지조있는 여자,

하지만 가끔 오프는 하는 소신 있는 요자,

게다가 이제는 철저하게 두 개의 블로그

가끔 이름이 헷갈려요.

어디 하나 빠지는 조건이 없다. 대체 이중성과 지조가 무슨 상관이냐고 물으신다면, '어쩐지' 오묘하게 상관이 있는 것 같지 않나효? 지조있게 이중적입니다. 하지만 남자친구인 청정숙은 한결같고 앞뒤를 뒤집어도 가슴이 없는 아름다운 여자의 신체와 비슷해서 오프라인과 온라인이 독자노선뿐이었기 때문에 블로그에 친구들이나 후배들이 종종 와서 비로그인 덧글을 달았다. 전화가 왔던 지인의 회사 언니도 그런 경로로 청정숙의 블로그에 오고는 했다고 한다. (알 바가 없다.) 그리고 그 회사 언니는 지조 있는 내 블로그에도 비로그인 덧글로 번 참여하셨다는데, (기억날 리가 없다.) 그 분이 잠적을 탄 두 블로거, 분명 연애한다, 라고 지인에게 추정했다 하신다.

오, 이거슨 바로 노비를 좇는 게 아니라 블로거를 좇는 추블꾼. 추블의 방법은 발달한 측두엽과 비로그인 덧글이었다. 하지만 청정숙은 요즘 저와 계급이 다른 블로그 사회에 살고 있어요. 그곳은 제가 갈 수 없는...바로, 회사 블로그. (띠옹)

 

"어? 어응,어.....으...응?.아...머...어...."

땀을 흘리며 어영부영 말을 얼버무린 청정숙에게, 지인은 다음 대사를 쳤다.  

"그래요? 그런데 수은님은 한 남자만 안 만난다던데요?"

"으응.....이제는 내가 잘 교육시켜서......잘 데리고 다니고 있어....."

아, 뭐. 그런가.

고마워 해야 하나.

 

 

 

그런 거랑 아주 상관이 없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청정숙은 가끔 나의 과거를 묻는다.

몇 명이나 만나봤어?

어제는 진지하게 물어보길래 나이대 중 하나를 고르면 해당 연도에 해당하는 연애 이야기만 해주겠다고 말했다. 그 연도에 연애를 했으면 꽝이라고 했다. 이야기를 조금 시작, 하다말다, 하다말다, 할게, 하지마, 할래, 해 봐, 시러시러, 하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대체로

A 너무너무 아름다운 사랑이었어

B 너무너무 상종하지 말았어야 할 지독한 놈이었어

이런 식의 이야기가 된다면 둘 중 어느 것도 바라는 바가 아니다. 그런데, 대부분 A로 시작해서 B로 끝나는지도 모르겠다.

C 어쨌든, 사랑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어

이것도 우습다.

무언가를 배웠다고 생각한 건 연애들의 종말을 거쳐 한참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리고 그것은 더 정확하게 말해서, 나이를 먹으면서 지나온 경험들때문에 여유와 연륜이 생겼고 거기에 비추어서 과거들을 투영한 것일 뿐이다. 내가 지나쳐온 연애들을 살펴보면 지금의 내가 어째서 이런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는지 좀더 잘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과연 달라지는 게 있을까?

정작 연애는 별로 경험이 없고(싱긋) 아무리 생각해봐도 하나같이 시시껄렁했다. 그것은 마치 로모카메라로 세상을 보는 일과 비슷하다. 매일매일 나는 횡단보도를 건넌다. 그리고 어느날 누군가 찰칵 하고 로모카메라로 그 장면을 찍는다. 프레임과 빛에 의해 장면은 다른 색감과 시선을 가진 단 하나의 사진으로 태어난다. 선명하지는 않지만 아름답고, 같은 장면이지만 나만의 어떤 특별한 날이다. 하지만 결말은 실패한 필름이다. 얼굴이 일그러져 있고 누군지 알 수 없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장면은 검은 홀처럼 보인다. 마스크를 쓴 치과의사가 되어 새까만 목구멍에 머리를 쑤셔넣고 자기 입안을 들여다 보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 괴롭더라도,

 

 

미련없이 사랑니를 뽑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사실은

저번 주말에 택배가 배달될 예정이라는 문자를 받았다.

이미 일년 전에 관계가 끊어진 사람이 무엇을 보냈을까

버-엉, 폭탄?

뱀?

곧, 무엇을 보냈을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생각을 접었다.

박스를 열었을 때 역시 '예상들'을 보냈다. 편지나, 포장지, 리본끈, 잡다한 종이조각들, 따위였다. 석사논문은 좀 예외였다. 쇼핑백도 들어 있었다. 쇼핑백만 있고 그 때 샀던 옷은 없었다. 다시 말해 옷은 안 보냈는데 쇼핑백은 보냈다.

그럼......쇼핑백은 왜...?

아....종이라서....균형 맞추려고....그럼 옷은......씹어 먹은 걸까...강력한 똥꼬가......?

웃으면 안되는 걸까, 잠시 생각해보았지만......웃다가 눈곱이 꼈다. 그러다가 문득,

 

대체

나에게 이것을 보낸 걸까

 

"그건 값비싼 티셔츠는 갖겠지만 쇼핑백은 갖지 않겠다는 뜻이지. 즉 겉과 속이 다르며 실리를 추구했던 너를 따끔하게 비판하는 뜻이다. 물건은 갖겠지만 종이조각 따위는 돈도 안돼. 빈 맥주병이 아니니까 말이야. 팔 수도 없지. 쓰레기를 버리는 일은 돈이 드는 일이야. 세이브 머니, 즉 절약 정신,아니겠니. 그는 결국 수돗세가 아까워 공공도서관에서 정수기로 물을 뜨고 양치도 지하철 화장실에 했던 사람이라는 걸 벌써 잊진 않았겠지."

혹은

"그는 밤마다 분노를 자위로 풀었어. 그리곤 그 화장지를 쇼핑백에 버렸지. 화장지가 가득 채워질 무렵 그는 괴성을 지르며 쇼핑백을 쓰레기통에 버렸지만 매일 책상 옆에 쇼핑백을 두고 있던 걸 본 그의 어머니가 휴지만 버리고 다시 책상 옆에 쇼핑백을 갖다놓은 거야. 어떻게 버려도 그 쇼핑백은 다시 그에게 돌아왔어. 마법의 저주와 같았지. 알고 보니 그는 몽유병이 있었어. 자기가 낮에 쇼핑백을 버리고는 밤에 다시 가져오면서 착각한 거야.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냐고? 어느날 옷장에서 휴지 밧줄을 발견했기 때문이야. 그는 그 휴지들로 밧줄을 만들어...귀에 꽂고......우주인과 교신하려 했었어. 미, 미안해."

혹은

"아무래도 이유는......그는 쇼핑백을 사랑했던 게 아닐까. 세상 무엇보다도 쇼핑백을 통해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더 나아지려는 욕망을 가지는 행위, 쇼핑백을 통해 브랜드의 가치를 마음 속에 심는 진정한 쇼핑백홀릭의 모습, 그것이 근본적인 이유야."

 

 

일관성이 전혀 없는 해석들이다. 만일 나라면,

(나라면 절대로 보내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만약을 위해 이런 말은 생략하는 게 좋겠다.

결국 그런 것이다.

나는 그가 무엇을 택배로 보낼지 알고는 있었지만 보냈는지는 알 수 없었던 것처럼

알지만 이해하지 못한다.

미안하지만 공감하지 못한다.

우리 조상들의 DNA는 아마 억년쯤으로 거슬러 올라가 인류가 태생되었을 때부터 다른 배합들로만 이루어져 이제는 결국 너무 달라져 버리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유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그 사람이 어떤 생각으로 이걸 보냈든 고스란히 해석하고 행동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서 방식대로 물건들을 정리했다. 버렸다. 정리가 하기 싫었거나 못했거나 혹은 내가 이걸 보면서 다시 기억을 더듬어 내가 했던 잘못들을 생생하게 떠올리며 반성하기를 원했거나 아니면 내가 너한테 준 거 다 돌려 줘 그 어떤 쪽이라고 해도 어떤 추상적이고 멋진 이유라고 해도,

이제는 상관없는 일이었으면 한다.

작년 한 전남편과 애인에게 살해당한 여성이 70명이라고 하는데 상관 있고 싶은 마음과 상관없고 싶은 마음이 자리를 못 찾아 일어난 일들이다. 살아 있는 건 귀한 일인데, 지금도 어디선가는 상관 있는 마음 둘이 엉키는 일과 엉겼던 마음이 떨어져 나가는 일들이 시시각각으로 일어나고 있을 것을 상상해 본다.

 

한편, 청정숙은 신민아와 가인과는 상관이 있고 싶어하고, 나는 장동건이 웨딩샵에 갔다는 기사를 보고 고소영과 상관이 있어졌다. 그리고 나는 지금 청정숙과 상관관계가 있고 옛날과는 아무 상관관계가 없는데 청정숙은 과거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고 지금 내 옆에 있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따져 보니 이 말이나 저 말이나 같은 말인데 또 덮어 말하는 걸 보니 언어능력은 좀 떨어지는가 싶지만, 내 남자친구로서의, 프로 근성은 있는 것 같다. 필드로 보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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